제 2회 방송작가 컨퍼런스를 상해에서 개최하다. 

2007.6.11

 

 

  

 

 

 


 

 

 

 

 

제1회 동아시아 방송작가 컨퍼런스

2006. 6. 15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작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숙소 해운대 누리마루 APEC 하우스 

 

 누리마루 내부에 만들어져 있는 미니어쳐

 

 APEC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각국 정상들 모습도 있다

 

 

 

 

 
                                    




 
 
*** 서울특별시 소식지 2000년 6월호 통권 115호
     직업의 세계 영상 번역작가


 
*** 경향신문 1996년 9월 24일
     중국어 번역"대부" 이덕옥씨
 


*** 매일경제 신문사 citylife 1996.2.10~2.18 제171호
     세방번역 중국어 전문 영상번역가 이덕옥


 


*** KBS 2TV 생방송 아침을 달린다 목요 초대석 1995년 6월 8일
   "판관 포청천"의 숨은 이야기꾼 중국어 번역가 이덕옥씨




 
 
*** 동아일보 1995년 4월 28일kh
    "포청천도 칠협오의도 내가 없으면 벙어리"
 
 
*** 한겨레21 창간 한돌 기념 특대호 1995.3.23 제51호
    무협지, 그때 그 사람!




*** 서초구청장의 봉사상   2010년 12월 28일







   
 
   
   
   

   


 
 
 
 
 
 
 
 

 

 

패왕별희 

 

      원저: 릴리안 리(李碧華), <<사랑이여 안녕>>
      감독: 첸카이거(陳凱歌)
      주연: 장국영, 장풍의, 공리, 갈우
      제작사: 톰슨 영화사(홍콩), 1993년 제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줄거리

1925년 군벌시대 중국을 배경으로 유명한 북경 경극학교에 맡겨진 두 소년 두지와 시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길고도 고생스러운 교육과정을 마친 후 섬세한 미소년 두지에게는 당연히 여자 배우 역할이 주어지고 시투는 군인 역을 맡게 된다. '패왕별희'는 바로 그들 두 사람이 줄곧 연습해온 경극이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던 때 쳉데이(두지, 장국영)와 두안 샬루(시투, 장팽이)는 가장 유명한 경극 배우가 되어 있었고 샬루는 홍등가의 유명한 창녀 주샨(공리)과 로맨틱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약혼자 사이인 그들을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쳉. 악의의 복수심에서 그는 한 부유한 후원자 유안에게 의탁하게 된다. 쳉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결혼하는 두안과 주샨, 그 두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낀 쳉은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1945년 일본군이 물러가고, 쳉은 일본군을 위해 노래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다. 그러나 한 유력한 국민당군 고급장교가 쳉의 연기를 보기 위해 북경을 방문함으로써 그는 풀려난다. 그의 범죄가 공연을 수락해 저질러진 것이고 또 그로부터의 면죄 역시 공연을 받아들여 이루어졌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해방시키고 경극 역시 혁명 이데올로기를 채택함으로써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열렬한 공산주의 찬양자인 양자 샤오 시의 냉철한 비난과 힐난을 받고 쳉은 경극배우 생활을 청산한다. 세월은 흘러 문화혁명의 불길이 치솟는 1966년, 샤오 시가 이끄는 홍위병들에게 심문당하는 두안.공개 자아 비판 때문에 이성을 잃은 두안은 쳉의 동성애 범죄를 폭로하고 이에 맞서 쳉은 주샨의 과거를 들이댐으로써 독기에 찬 공격을 가한다. 자기통제력을 잃은 두안은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증언함으로써 주샨을 자살로 이끈다. 텅빈 경극장을 함께 걸어가는 쳉과 두안의 1977년. 그들은 '패왕별희'의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 홍성진 영화해설

 

장국영 當愛已成往事(당애이성왕사)-패왕별희 주제곡

 

往事不要再提 人生已多風雨
왕스 뿌야오 짜이 티 런셩 이 뚜오 펑유이
지나간 일은 다시 생각하지 말아요. 인생에는 험난한 일들이 많아요

縱然忘記抹不去 愛與恨都還在心裡
쫑란 지이 모뿌추 아이 위 헌 또우 하이 짜이 신리
결국에는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사랑과 증오는 모두 마음에 있답니다

眞的要斷了過去 讓明天好好繼續
쩐더 야오 뚜안러 꿔취 랑 밍티엔 하오하오 지쉬
정말 과거를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내일은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요

니就不要再苦苦追問我的消息
니 지우 뿌야오 짜이 쿠쿠 쭈에이원 워더 샤오시
당신은 다시는 제 소식을 힘들게 묻지 마세요

愛情타是個難題 讓人目眩神迷
아이칭 타 스꺼난티 랑 런 무시엔 션미
사랑은 어려운 문제에요. 사람들에게 눈을 어둡게 하고 빠져들게 하죠.

忘了痛或許可以 忘了니却太不容易
왕러통 후오 쉬커이 왕러니 취에 타이 뿌 롱이
아픔을 잊거나 당신을 잊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아요.

니不會眞的離去 니始終在我心裡
니 뿌 청 쩐더 리취 니 스쫑 짜이 워 신리
당신은 정말 떠나지 않으실거에요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요

我對니仍有愛意 我對自己無能爲力
워 뚜에이니 렁 여우 아이이 워 뚜에이 쯔지 우넝 웨이리
나는 당신을 한결같이 사랑해요. 하지만, 제 자신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因爲我仍有夢 依然將니放在我心中
인웨이 워 렁 여우 멍 이란 지앙 니 팡 짜이 워 신중
저는 당신을 내 마음 속에 담고 싶은 꿈이 있어요.

總是容易被往事打動 總是爲了니心痛
쫑스 롱이 뻬이 왕스 따 동 쫑스 웨이러 니 신통
결국 지난 일에 의해 흔들리고, 결국 당신을 위해서 아파합니다.

別流連歲月中 我無意的柔情萬種
비에 리우리엔 수에이유에 쭝 워 우이더 러우칭 만쫑
세월에 빠지지 말아요. 나는 무심코 키운 정이 너무 깊어요.

不要問我是否再相逢 不要管我是否言不由衷
뿌야오 원 워 스포 짜이 샹펑 뿌야오 꾸안 워 스포 앤 뿌 여우 쫑
제가 서로 만날 수 있는지 묻지마세요. 제가 속에 없는 소리를 한다고 상관하지 마세요

#爲何니不동 只要有愛就有痛
웨이허 니 뿌동쯔야오 여우 아이 지우 여우 통
왜 이해를 못하나요? 사랑이 있다면, 아픔도 있는거죠.

有一天니會知道 人生沒有我幷不會不同
여우 이 티엔 니 후에 쯔따오 런셩 메이여우 워 빙 뿌 후에이 뿌 통
어느날 당신은 알게 될 거에요. 인생에 제가 없지만 똑같을 거에요.

人生已經太悤悤 我好害pa總是淚眼朦朧
런셩 이징 타이 총총 워 하오 하이파 쫑스 레이앤 멍렁
인생은 이미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요. 저는 언제나 결국 눈물로 그득할까봐 두려워요.

忘了我就沒有痛 將往事留在風中...
왕러워 지우 메이여우 통 지앙왕쓰 리우짜이 펑중
저를 잊는다면 아픔이 없을거에요. 지난간 일은 바람에 뭍어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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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의 세 가지 주제
      

      이 영화는 경극과 경극의  공연 목록인 <패왕별희>,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소가 중국현대사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를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영화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패왕별희>에서 항우역을 맡은 샤오루(段曉樓.  장풍의분)와 우미인 역을  맡은 데이(程蝶衣, 장국영분), 그리고 샤오루의 부인이 된 쥬산(菊仙. 공리분) 이라는 여주인공을 가리킨다. 주인공들은 현대 정치사에서 중요한 무대, 곧 군벌시대, 국민당 시대, 중일 전쟁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문화 대혁명이라는 큰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고 좌절하다가, 마침내 문화  대혁명의 주역이었던 4인방이 몰락하고 등소평이 등장하는 때에 맞추어 자신들의 연극 인생도 끝을  맺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적어도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감상할 수 있다. 하나는 <패왕별희>를 통한 경극 이해  그 자체이고, 둘째는 현대 경극사이며, 세 번째는 국가와 문화와의 관계이다.
      
패왕별희.jpg      경극 <패왕별희>는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에     나오는 고사를 중심으로 만든 경극 목록 중의 하나로서,     원대인이 영화 중에서 말한 것처럼 초와 한의 전쟁 고사를     극화한 <千金記>라는 명대의 작품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진나라 말기에는 진의 지배체제에     항거하면서 일어난 진승 오광의 반란이 있었는데, 항우도 그     일원으로 참여하다, 결국 진을 무너뜨리고 초나라의 패왕이     되지만, 자신이  임명한 한왕 유방에게 싸움에서 패배한 뒤, 마     침내 자살하여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리고  항우가 항상     사랑했던 우희(우미인이라고도 한다)도 이 해하의  싸움에서 유     방의 군대에 포위된 것을 안 항우가 자신의 심정을 절절히  부른     노래, 곧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자기가 사랑하는 말인) 오추마까지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까.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를 어찌할까?"라는  노래를 부를     때 이에 화답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항우의 우희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그에 자살로 보답한 우희의 정절,  항우의 비장한     최후는 중국인들이 즐기는 이야기 거리였고, 이것이 명대에 이르러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패왕별희>의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양하고 연원이 깊은 수많은 극 목록에 비한다면 <패왕별희>는 비교적 늦게 공연 목록으로 선택된 셈이다.
      
      북경 지방의 극이라는 뜻을 갖는 경극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대체로 청대 중 후기였다. 중국에는 중화민국 시대에만 해도 수백 종의 지방 극이 있었는데, 경극은 청대에 발전하였던 많은  지방극 중에서 양자강 중하류에 자리한 안휘 지방의 극단이 건륭제의 80세(1790) 생일에 북경으로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경극이란  여러 지방 극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립된 지방극 중의 하나였고,  이후 다른 극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한편, 다양한 대본과 특색 있는 무대, 분장과 복장, 음악, 노래 등을 발전시켜, 청말과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극으로 등장하였다. 조선에서 파견된 연행사절, 예를 들면 홍대용 같은 이도 이 경극을 관람한 뒤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조선 사대부들에게도 이 극이 소개되었던 듯하다.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현대 경극의 역사이기도  하다. 경극의 역사에서 20세기는 상당히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경극의 중요한 양식들인 노래, 동작, 대화, 율동에서 발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난 경극배우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출되었고,  또 다양한 관객들을 끌어 모아, 중국사상 대중 예술이라는 장르가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중국에서 서양문화는 곳곳에 스며들어 중국사회를  바꾸어 놓았으나, 연극만은 여전히 중국의 전통극이 압도적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의도에 따라 움직여야 했고, 이에  따라 오랫동안 민간사회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경극은 심하게 왜곡되었다. 그 왜곡의 정점에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루와 데이, 쥬산 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샤오루의 부인이던 쥬산이 목을 매고, 데이가 마치 실제 우희가 그랬던  것처럼 샤오루의 칼을 빼어 자살하는 바와 같이 비극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는 문화에 대한 정치의 간섭과 그에 따른 비극이라는 상징이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2. 배우 훈련과 후원 시스템.
      

     영화는 창녀의 아들이면서 육손인 도즈(小豆子)가 엄마 손에 이끌려 관사부의 경극무대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의 엄마인 연홍은 기루에서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경극배우가 되어 제 한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으로 길거리 극단에게 도즈를 데려갔지만, 육손이라서 퇴짜를 맞고 만다. 그러자 모진  마음으로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고, 입단을  허락 받는다. 계약은 10년간이다. 대략 5년여 동안 훈련을  받은 다음, 나머지 5년 정도의 기간은 극단을 위해 무료로 공연을 하는 것이다. 뒤의 5년은 훈련 때에 들어간 비용을 갚는 기간이라고 보면 좋다. 이것이 관례다. 영화는 이 관례를 잘 따르고 있다. 이들 배우도  다른 직업 길드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신 바와 같이(영화 <붉은 수수밭>에서도 주신에게 제를 지내고 있다), 자신들의 신인 희신(喜神), 곧 당 나라 때의 현종을  모신 희신전(喜神殿)을 가지고 있었다.  '당 명황의 양귀비요'라는 노래 말로 우리에게 알려진 현종이  궁성 안의 梨園에서 예인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뒷날 배우들의 직업신이 된 것인데,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신에게 맹세를 하여야 하는 의식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 신은 앞으로 배우들과 운명을 같이 할 존재로서 무대의 분장실에 항상 모시고  있어야 했다. 도즈, 곧 후일의 데이도 맹세 의식을  거치고 있다. 이 의식은 달리 말하면 신 앞에서 사부와 제자 관계를 맺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부자 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직업  길드에 있어서 최상급자의 지위는 가족 내에서 가부장의 권위에  필적하기 때문이다. 또  관사부는 패왕별희가 담고 있는 교훈을 단원에게 설명할  때도 이 신전을 이용하고  있다. 그만큼 장엄한 곳이라는 뜻이다.
      
      단원이 된 도즈에게 기다리는 것은 혹독한 훈련이다.동작을 부드럽고 민첩하게 하기 위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또 대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고통이 따랐다. 후일 영화 속에서 원세경(갈우분)이 샤오루를 불러, 패왕의 걸음걸이는 원래 몇  일곱 발자국이었는데, 왜 너는 그것을  다섯 걸음으로 줄었느냐 라고 말하면서  힐난하는 장면은, 걸음걸이를  포함한 몸 동작 하나 하나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경극이란, 얼굴을 어떤 색으로 하며, 어떤 옷을 입으며, 손은  어떻게 처리하며, 눈동자는 어떻게 움직이느냐, 발걸음은어떻게 옮기며, 어떤 노래를 부르느냐 하는 모든  모습이 상징화되는 극이다. 예를 들면 영화 속의 경극 배우 데이는 붉은 색이 도는 분장을 하였는데, 극 중에서 붉은 색은 정절을 상징하고, 샤오루의 수염으로 뒤덮인 검은 색 분장은 두려움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는 인물을  상징하고 있다(포청천의 얼굴도 검은 색이란 것을 주목하라. 조조는 항상 흰색으로 나오는데, 이 색은 표리부동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마디 첨가한다면, 중국인은 술을 마시고도 아무 변화가 없는 흰 얼굴을 매우 싫어한다).또 배경이나 소도구도 거의 없는 무대 위에서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면을 움직임과 소리, 음악, 분장 따위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손 모양새나 발걸음 하나 가볍게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경극이 인기 있는 대중문화의 하나이긴 했지만, 배우가 처해 있는 사회적 지위는 열악하였다. 관사부의 훈련을 받는  단원들은 도즈와 같이 팔리거나 내맡긴 어린이들이었다. 훈련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훈련장으로 쓰이는 사합원을 뛰쳐나가 도망갈 정도로, 경극 배우로  성장하는 길은 가시밭이었다. 그러나 훈련원을 나간다고  해도 당장 침식이 문제일 정도로 단원들은 극빈층이나 최하류 계층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국민당 시대였던 20년대에는 물론 법적으로 완전한  사민평등이 이루어졌지만, 사회적으로는 예인들이 여전히 최하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연예인은 이른바 오자 행업(五子行業)이라고 하는 최하계층에 속하였는데, 그 다섯 가지 직업  속에는 배우 이외에 목욕탕 때밀이, 식당 종업원, 창녀, 날품팔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이들업종에는 달리 살 길이 없는 사람만이 종사하였고, 배우 역시 남들이 업신여기고 깔보는 대표적인 직업이었다. 연홍이  관사부에게 "천하다고 안 받아 주는군요"라고 했을 때, 관사부가 "당신이나 우리나 뭐가 달라"라고 한 말은 이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훈련 과정에서 치르는 가혹한 매질도 따지고 보면, 좋은 배우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매질을 하더라도 극단의  꼬마들은 달리 호구의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만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등한 지위가 배우들로 하여금 무대에 더 많이 서려고 노력하기 보다, 영화  속의 샤오루처럼 어떻게 하면 그 짓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가 하는 타성을 낳았으리라.
      
      예쁘고 부드러운 얼굴과 몸매 때문에- 그가 받은 예명이 접의인 것을 보라. 말 그대로 '나비 같은 옷'이다- 관사부의 눈에  든 도즈는 한번 정해지면 평생을 해야 하는 고정배역을 맡게 된다. 그것은 단역(旦役)이었다. 단역이란 남자로서 극중에서 맡는 여주인공역을말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경극 배우인 매란방(梅蘭芳, 1894-1961)이 바로 이 단역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도즈는 특히 손가락이 길고 예뻤기 때문에 춤동작에서 마치 난초 꽃과 같은 모양의 난화수(蘭花手)가 일품이었다. 육손에서 난화수를 뽐낼 정도의 배우로 바뀌었으니, 뽕밭이 바다가 된다는 속담의 본보기가 여기 있다. 얼굴이나  몸매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고왔기 때문에 단역으로서는 적격이었다. 물론 소두자가 단역을 맡기까지에는 힘든 고통, 특히 사내아이의 정체성을 버리고,  여자로변신해야 하는 피나는 고통이 따랐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길거리의  <손오공> 공연에서 머리로 돌을 깨어 엉터리 공연으로 분노한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달래었던 시토(小石頭)- 우리말로 하면 말 그대로 돌대가리이다- 는 예의 씩씩한 생김새와 뛰어난 무공  때문에 생역(生役)을 맡게 되었다. 생역은 극중의 남자 주인공역을 말한다. 아마 그는 주로 항우역을 맡았으므로,  생역 중에서도 무생(武生)이었으리라. 이로부터 뗄 수 없는 단역의 데이와 생역인 샤오루의 관계가 시작된다.
      
      경극은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해서 대중들에게 명성을 얻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 처럼, 부유한 후원자를 만난다면 앞으로의 연극 인생은 쉽게  풀릴 수 있다. 청나라 때 같으면 황제도 후원자가 될 수 있고, 부유한 상인이나 관료도 후원자가 될 수 있다. 자금성 내에도 가정집을 상징하는 내조(內朝)에 희원(戱院), 곧 공연무대가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권력을 쥐락 펴락했던 서 태후도 열렬한 연극광이어서, 북경 서북부의 이화원에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조의 관료층도 경극을좋아하였고,  이는 영화 <패황별희>에서 장내관이나 원세경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패왕별희>에서 소두자의 생김새나 연극이  마음에 들어 무대에 세운  것도 장내관 쪽이었다. 경극에 출연할 아이와 무대를 선정하는  일은 관사부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 인정을 받은 도즈와 시토는 장내관의 환갑잔치에 초대되어 이후 그들의 장기로 삼은 <패왕별희>를 공연하게 된다. 후원자인 장내관은 환갑잔치라는 경사스러운 잔치에 어울리지 않게 <패왕별희>를  요구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이  경극을 통해 청나라의 회복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장내관은 자신을 패국의 신하로 상정하였는데, 영화에서  장내관이  태후마마를 모시고 경극을 보았다는 단장의 말이 바로 그 부분이다. 경극이 1949년 이후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즈는 이 극의 성공으로 인해 명성을 얻었지만,  그에 따른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장내관에게 동성애의 대상이 된 것이다. 보통의 관객들에게 이 장면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 경극이라는 장르를 역사 속에서 제대로 보기 전에는 경극 속에 담긴 동성애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어떤 점에서  영화 <패왕별희>는 경극사  그 자체를 다루기 보다, 데이라고 하는 단역의 주인공이 점차 연극에 몰두해 가면서 현실과 경극을 구분하지 않고, 연극 자체를 자신의 인생으로 대치시키는 데 따른 비극에 더 초점을 맞춘 듯하다. 따라서 영화  <패왕별희>가 인기를 끌었던 것은 경극과 현대사라는 요소보다 데이라는  주인공의 동성애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만큼 이 영화 속에서  동성애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왜 경극과 동성애가 연결되어야 하는가.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경극이라는 무대극이 북경에서 공연되던 18세기 말엽부터 이 동성애는  문제가 되었다. 뇌살적으로 연기하는 여장 남배우들은 당시에도 인기가 높았고, 이것은 당연히 당시의 유교적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역을 모두 동성연애자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명배우 매란방은 아내와 아이들을 둔 훌륭한 가장이었다. 그 점에서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는 유별날 정도로 동성애 장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자칫 경극  자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중국의 전통 지방극은 유형만 해도 300종이 넘으며, 이들  극이 무대에 올리는 공연 목록만 해도 수 만 가지였고, 이 많은 극들이 다루는 주제 또한 그만큼 다양하였다. 또  <패왕별희>라는 경극 자체도 동성애보다는 애국과 사랑이라는 요소가 강한  극인데, 이 영화에서는  동성애라는 주제를 너무 부각시킨 탓에 경극과 <패왕별희> 자체가 갖고 있는 본질적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패왕별희(2)          

       3. 국민당 및 항일전 시기의 경극
   

       관사부가 운영하는 극단과 맺은 계약  기간이 끝나자, 시토는 단샤오루(段曉樓)라는 이름을 얻고, 도즈는  청데이(程蝶衣)라는 이름을 각각 얻어 독립한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생역의 꼬마 돌머리는 집처럼 큰 풍채와 힘을 가진 초패왕  항우같은 멋진 남자로 성장하였고, 콩처럼 작은 꼬마 도즈는 나비와 같이 하늘거리는 몸매와 동작, 소리 등으로 항우의 희첩인 우희를 맡을  단역으로 성장하였다. 길고 험한 전문 배우 양성과정인 과반(科班)을 수료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초대반(草臺班)이 된 것이다. 초대반은 자금성에서 공연하는 궁정 극단이나 관료 및 대부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반(家班)과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관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공연해야 했다. 관가나 부유한 사대부들의 부름에 응하기도 하지만, 술집이나 찻집과 같은 상설무대나, 시장과 같은 임시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관사부 밑에서 훈련을 받은 샤오루와 데이가 풍찬 노숙의 무대가 아니라 찻집이라는 상설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들이 북경의 사합원 훈련반을 떠나 세상에 나왔을 때, 중국의 국정은 어수선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젊은이들은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무저항 반대>를 부르짖고  있다. <무저항 반대>란 국민당의 일본 침략에 대한 정책이 무저항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나온  구호이다. 젊은이들은 이  어려운 시국에 경극이나 공연하는 두 배우를 보고 낮 도깨비 같다고 하면서 질타한다. 경멸하고 분노하며 마음껏 조소하는 것이다.
      
패왕별희1.jpg   그러나 마나 데이는 연기에 몰입하면서  단역을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극과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은 우희여야  하고, 샤오루는 항우여야 한다.    원대인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극중의 동작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원의 '사랑'은 거절할    만큼, 샤오루에 집착한다. 왜 그런가? 경극의 단역    배우들이 모두 여성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데이는    현실과 경극을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데이와    샤오루의 갈등이 이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자애로운 여자가 되어 샤오루를 보호해    주고 싶은 것인가. 훗일 아편에 빠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면, 모성 결핍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거꾸로 자신을    버리면서 손가락을 자른 것이 어머니였기 때문에, 여성 혐오라도 걸린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정말로 연극에 몰두해서  자신의 인생은 우희다, 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인가. 아마 이것은 데이가 도즈였을 시절, 정체성을 바꾸는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해 쩔쩔맬 때  이미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도즈는 바로 그 남자,곧 시토에게 담뱃대로 입안을 휘둘리며  피를 흘리고 나서야, 자신의 역할이 여성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역으로 태어나게 한 것은 바로 그 샤오루가 아닌가. 어쨌든 데이가 천하에서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인물이 샤오루였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샤오루는 오히려 생역은 단지 연기일 뿐이라며, 화만루라는 기루를 찾아가 쥬산을 만나고, 봉변을 당하는 그녀를 구해주면서 마침내 결혼을 신청한다. 기생집을 출입한다는 사실은 샤오루의 수입이 괜찮은 수준까지 올랐음을 상징하리라. 이것이 대개의 배우들이 하는 통상적인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데이의  관심을 일축한다. 갈등을 느낀 데이는 원대인의 초대에 응한 다음, 친한 사이가 되자는 원의 요구에 화답한다.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복수할 참인가.  세 사람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되는  시점이다. 갈등의 대립  지점에 서있는 사람은 데이와 쥬산이다. 데이와는 달리 기녀였던 쥬산은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극과 현실을 구분하는 샤오루보다 더 현실을 이해하려고 하며, 가정의 소중함도 아는 여성이다. 특히 기루에 있던 여성에게 샤오루와 함께 하는 가정 생활이란 얼마나 힘들게 얻은 행운인가.
      
      전쟁통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역사상 그처럼 인기를 얻은 적이 없을 거라는 관사부의 말은  국민당 시대에 경극이 얼마나 대중들의 박수 갈채 속에 있었는가를 웅변해 준다. 왜 이렇게 인기가 높았는가.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짐작컨대 후원자들의 지원이 이 인기에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에 못지 않게 다른 요소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5.4운동 이후 경극은 연기 예술의 향상과 정교화를 통해 수준 높은 연기자를 배출하는 한편, 학교를 세우고 잡지와  서적을 출판하여 교육과 홍보를 장려하면서 수준이 올라 있었다. 또  사회 경제적으로 유한 계층이 늘었다는 것, 도시가 팽창하면서 관객이 증가했다는 사실도  큰 몫을 하였다. 그에 못지 않게 국민당이 북경지방의 언어를  표준어로 정하여 적극적으로 보급한 일도  이  극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언어 정책은 영화 <완영옥>에소 보았듯이 유성영화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어수선한 정치  현실에 대한 도피적인  성격도 있는 듯하다. 공연 목록들이 대부분 과거에 있었던 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관객들의 과거 회상과  연관될 것이다. 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공산당에서도 초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반면 국민당은 우호적이었다. 국민당 지배를 비판하는 극들은 사실 거의 없었던 셈이다. 두 주인공이 화려하게 무대를 수놓던 30년대가 내우외환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반면 개인의 사회였고 즐겁고 통쾌한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옛 꿈의 시대라고  평한 첸카이거의 말을  되돌려 본다면, 이 영화 속에서 국민당 시대가 갖는 또 다른 의미가 포착되리라.
      
      절정 뒤에는 퇴락이 오는가.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데이 또래의 학생들은 극장 안에서조차  전단을 뿌려대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결국 극장으로 들어가는 전기를  끊고 문을 강제로 폐쇄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은 예술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일 것이다. 자신들의 내부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애국해야 하는 상황도 파시즘이  낳은 또 다른 모습이리라. 더구나 데이는 일본군의 공연요청을 거절했다 체포된  샤오루를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본군 사령관  아오키 앞에서 경극을  실연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헤어지고  무대도 삭막해진다. 무대를 잃은 다음의 경극배우에게 오는 것은 우울함과 타락이다. 데이는 점차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샤오루는 노름과 술 따위에  빠진다. 아편과 술 따위는 섬세한 표현과 좋은 목소리를 내야하는  극 배우들에게 독약이나 마찬가지이다.
      
      불행한 것은 영화의 경우, 필름을 통해 어느 곳에서나 관객을 만날 수 있었던 반면, 경극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계층과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언어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경극은 지방색이 강한 언어였다. 관객이나 후원자들을 이끌고 무한이나 중경과 같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경극배우들에게 큰 약점이었으리라.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북경과 같은 지역에서는 더욱 그랬다. 따라서 경극배우들에게 중일전은 영화배우들보다  훨씬 더 큰  악몽이었다. 샤오루는 이제 호구를 위해 수박장사라도 해야될  판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을 무대에 서게 했던 관사부마저 운명을 달리 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두 사람이 다시  모이기는 하였지만, 관사부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가운데에서 과반조차도 해체되었다.
      
      두 사람에게 지옥같은 상황은 중일전  승리 이후에도 이어졌다. 다시 무대에 선 데이는 공연 중, 상이 군인들에게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는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군 앞에서 공연한 것이 빌미가 되어 반역죄까지 뒤집어쓴다.  당시 한간죄는 무서운  죄였다. 대만 영화 <비정성시>에서도 문웅네의  셋째인 문량이  일본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고 해서 한간죄로 걸린 다음 폐인이 되었듯이, 45년 이후 일본군 협력자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더구나 항일전의 종결이 모든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중국 대륙을 놓고 최대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인들도 어느 한쪽에 가담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운 시절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이라는 이 힘든 시절에 데이와 샤오루가 시대를 어떻게 읽고 있었는가는 영화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
      
      4. 문화대혁명 시기의 경극

      이 영화의 압권은 인민공화국  체제 아래서 경극  배우들이 당하는 어려움, 특히 고혈을 짜는 듯  고통스러웠던 문화 대혁명 때의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국가체제의 변화가 몰고 온 커다란 회오리 바람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 바람 속에서 온전하게 자신을 지킨 중국인은 거의 없다고 할만큼 문혁의 생채기들은 깊고 아픈 것이었다.

        인민공화국의 성립은 국가  체제 자체가  그렇듯이 경극분야에서도 사회주의 체제에 맞는  형태로 바뀌어야 했다.  이제 경극의 극장이나 배우는 국가의 통제를 철저하게 받아야 했다. 국민당 시대와는 달라진 것이다. 이에 따라 극장은 국가 소유로 바뀌었고, 배우들은 국영극단에 배속되어 봉급을 타는 존재가 되었으며, 경극 내용 역시 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 체제에 맞게 인민을  위한 경극이어야 했다. 샤오루와 데이는 새롭게 바뀐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데이는아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제 원세경과 같은 막강한 후원자는 필요 없었다. 국가가 그 일을 대신할 터였다. 후원자에게  맡기는 것은 결국  경극이 갖는 구체제적 성격을 지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는 계급투쟁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부르조아적 구세력'들을 정비하면서 희극계를 국가의 완벽한 통제하에 둔 것은 대략  50년대 전반이었다. 체제에 맞는 신편극이 탄생하였고, 구질서를  옹호하는 성격이 강한  극도 무대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기호가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 없었던 점이 중공당국에게 고민거리였다. 이  점은 데이도 읽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 맞춘 현대경극은 그가 보기에 의상이나 무대 배경에 있어서 경극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다. 샤오루가  말하는 바와 같이 재미없는 경극이 될 것이 뻔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50년대에 나타난 현대 경극에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그나마 50년대는 전통에 뿌리박은 경극인들에게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여유라도 있었으나, 66년부터 몰아닥친 문화대혁명은 호흡은 커녕 피를 부르는 형태로 예인들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중국영화 속에서 그렇게 비극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문화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문혁의 공식 명칭은 '프로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으로서 1966년부터 시작되어 76년에 마무리되었는데,  중공이 내세운 목표는  말 그대로 진정한 프로레타리아 사회를 건설하려는 데 있었다. 이 운동이 시작된 배경은국내외적으로 조금 복잡하다. 대외적인 요건으로서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던 소련과의 갈등이  컸고, 또 월남전도 확대되면서 중국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악화되어 감에 따라 중국이 위기를 느끼지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중국식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58년 무렵에  시작된 대약진 운동이 61년에  이르러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내면서 실패로 끝난 것도 문화대혁명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모택동 일파의  권력이 위협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당 지도부, 특히 모택동은 문학 예술이나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부르조아지의  반격이 두드러진다고  보았다. 그 중에서도연극계가 마치 '제왕장상부 (帝王將相部)'나,  '재자가인부(才子佳人部)'와 같이 행동한다고 비난한 것이 비극의 싹이었다. 제왕 장상이니 재자 가인이니 하는 말 자체에서 보듯이 모  일파는 연극계를 구세력의 본거지로  파악한 것이다.  이것이   역사학자   오함(1909-1969)이 쓴 연극 대본 <<해서파관 (海瑞罷官) >>에 대한 공격으로 비화되면서, 문예비평의 수준을 넘어 정치투쟁, 계급투쟁, 권력 투쟁의 단계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권력지도부는 명대의 이름난 관료였던 해서(海瑞)의 관직을 빼앗은 황제를 모택동이라 비정하였고, 따라서 오함의 비판은 곧 모택동의 비판이라고 규정 하면서, 마침내 배우 출신이었던 강청을 앞세워, "건국 이후 문예계는  반당, 반사회주의의 검은 끈이 우리를 독재하여 왔다"는 기요(紀要)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학술계, 문화계, 교육계, 출판계 등 곳곳에 박혀 있는 "반동  부르조아 패거리들을 찾아내어 처리할 일"만 남았다. 홍위병과 강청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극을 "사악하고 음란한 세계에서 끌어내어","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아니었다. 1850년대의  태평천국 지도자들과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이 지난 5.4신문화  운동의 지도자들도 거의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통 경극이야말로 반혁명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혁명적인 배우와 소재로 대체해야 한다는  정책에서 볼 때, 데이와 같은 배우와 종래의 <패왕별희>는 폐기되어야 했다. 영화에서 그런 인물은 데이가 키웠지만 데이의 우희역까지 가로채간  서라는 아이가 적격이었다. 문혁 이후 <패왕별희>와 같은  전통극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인민공화국 이후의 사실이나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된 극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패왕별희>의  주인공들은 어떤 모습인가. 실제 그들은 사회변화에 거의 무관심하였다. 인민 공화국  성립 이후, 이른바 삼개예인(三開藝人)이란 말이 돌았는데, 그것은  국민당과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인민공화국 삼대에 걸쳐  활동한 배우들을 지칭하였다. 바로 데이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데이도 할 말은 있다. 간첩죄로 몰린 데이가 "경극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일본의 아오키가 살아 있다면, 경극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행하였을것"이라는 데서 그의 경극 지상주의 혹은 중국문화 지상주의가 번득인다.
      
      이제 영화는 극적인 장면만이 남아 있다. 홍위병 패거리들은 세 사람을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다. 그리하여 데이는 샤오루를 비난하고, 더 나아가 쥬산까지 궁지에 몰아 넣는다. 샤오루 역시 데이 뿐만 아니라, 쥬산에  대해서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그녀를 절망에빠뜨리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없다. 누가  죽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造反  有理(반란에도 이치가 있다)"라는 홍위병들의 구호가 살벌하게  거리에 횡행한다. 그  꼬맹이 붉은 병사들 속에 후일의 첸카이거도 거리를 누비고 있다. 첸카이거니, 장이모우니 하는 5세대 감독들의 자화상이리라. 쥬산이 자살하고, 마침내 모든 것이 파멸되고 만다. 현실주의자인 쥬산 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또 쥬산의 자살은 그나마 데이를 현실로 복귀시키려는사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데이에게도 비극적이었다.
      
      5. 문화대혁명 이후의 경극

      영화는 광풍이 휘몰아친 지 11년 뒤, 등소평 시대가 등장하면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패왕별희>라는 자신들의 장기 목록을 가지고 무대에 서서 재회하는 것으로 끝맺음한다.  이것은 물론 우연적 요소가 지나치게 강하여- 마치 <첨밀밀>이라는 영화에서 장만옥과 여명이 뉴욕의 어느 길모퉁이에 만나는 것 만큼이나 우연이리라- 현실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중요한 상징이다.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사인방이 몰락하고 난 뒤, 다행스럽게도 예전의 극들은 다시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대사  속에서 사인방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극의 혁명성 못지 않게 예술성이나 대중들의 기호 역시 중시해야 할 요소라는 깨달음이 뒤늦게  왔던 것이다.

       데이와 샤오루가 다시 무대에 선 것도 전통극의  부활을 상징하리라. 그러나 영화의 끝맺음은 공연을 무사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희가 자살한 저 진나라 말기의실제 상황처럼, 데이도 사연  많던 샤오루의 검을 빼어 자살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를 극적이게 한 장면이지만, 사실 극적인 미화가 지나쳐 사실감을 놓쳐 버리고 있다. 이 영화의 저본이 된 소설 <<사랑이여 안녕>>에서는 문화대혁명 중에 복건 지방으로 내려가 강제 노동을 한 샤오루가 홍콩으로 탈출한 뒤, 우연히 북경 경극단의 공연 선전 포스터에서 청데이(程蝶衣)의 이름을 발견하면서 재회하고, 마침내 다시 예전의 <패왕별희>를 공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시나리오도 소설을 쓴 릴리안 리의 것이기 때문에, 영화 <패왕별희> 속에서 비극적으로  최후를 그렸다고 해서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소설 쪽이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경극인들의 인생 유전을 현대사와 엮어 묘사하는데 있어 이 영화가 아무리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경극의 동성애 부분을 강조한 것이나, 비장미로 영화를 끝낸 것은 이 영화의 흠이 아닐까. 이것은 자칫 경극이란 동성애를 주제로 한  전통극이구나, 하는 인식을 줄 위험도 있다. 비장하게 죽는다고 하여 데이가 예술지상주의자였다고 할 수도 없으리라. 경극이라는 예술이 현실적으로 생명력을 가지려면, 전통성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현실에  맞게 고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는 데이도 샤오루도 결국 해내지  못하였다. 데이는 자신의 역할에서 끝까지 빠져 나오지 못하였고, 샤오루는 석두라는 별칭 때문일까. 현실과 극을 구분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청대 경극의 최대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창신(創新)의 정신이 이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경극인들이 시대 변화에 무심하지 않았던 대목은 현대사의 여러 군데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청말  민국 초기에 희곡계에서는 사회 변화를 주도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 변화를  돕는데 경극이 기여하여야 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유명한 단역 배우였던  매란방 역시 경극이 시대의 변화와 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도 예술 지상주의자였으나, 경극 자체가 역사적으로 여러 지방의 극 요소들을 흡수하여 발전한 것이므로, 경극의 예술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여러 차례 지적하였던 것이다. 매란방과  더불어 4대명단(名旦)이라고 알려진 순혜생(荀慧生, 1900-1968), 상소운(尙小雲,  1900-1976), 정연추(程硯秋,  1904-1958)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중화민국 시대(항일전  시대까지 포함하여)에 걸쳐 두 배우가 극 중에서 어떠한 변신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경극을 수동적이고 시대와 고립된 극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감독의 불찰인가,  아니면 고의인가.  첸카이거 감독은 이들을 예술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그랬듯이 단순한 기능인으로 본 것은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 정체된 듯한 전통은 중국의 전통  문화 혹은 중국영화가 안고 있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중화인민 공화국  이후, 전통에 바탕을 둔 극을 창출하여야 했지만, 경직된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으리라. 티브이와 영화 때문에 경극 관객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경극으로만 밥을 먹고살던 시대는 거의 끝난  듯하다. 데이가 우희로서 자살하는 것은 전통문화의 끝을 말하고자 하는가. 개혁 개방이라는 현실 속에서  전통문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어렵기는 영화 쪽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영화에 맞서기  위해 중국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유리할 터이지만, 법고 창신(法古創新)이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개혁 개방 이후 영화 제작비용도 스스로 충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패왕별희>란 영화도 외국자본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다. 결국 흥행을 위해 불가피하게 데이는 동성애의 주인공으로  끝낸 것은 아닐까. 비장미에 감동하는 관객들을 위해 희생된 셈은  아닌지. 이렇게 보면 이 글의첫머리에서 제기하였던 세 가지 주제  중에서 경극 내부의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입단과정, 훈련모습, 단원과 후원자의 관계, 극단과 극장, 공연상황,  그리고 복장, 소리, 음악과 같은 경극의 요소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어 경극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경극인들이 최대한 도와주었을 것이다.
      
      또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위와 같은 부분 못지  않게 현대 중국에서 국가와 문화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 데  있다 하겠다. 비록 50여 년의 짧은기간이지만- 그러나 개인사로서는 긴 시간이다- 그  험난한 정치적 변화의 과정에서 데이와  샤오루, 쥬산이 현존의 정치체제로부터 당하는 폭력이 이 영화의 압권이 아닐까. 아마 감독은 현대 경극의 역사나 그것의 예술적 경지보다 국가가 예술에  가하는 폭력을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으로 앞장섰고,  또 운남 지방으로 강제로 내려가 노동을 하면서 겪은  첸카이거의 혹독한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 점으로 본다면 이 영화처럼 재미있는 요소들이 줄줄이 늘어진 영화도 드물 것이다.
      
      참고문헌.
      * 김학주. <중공의 舊劇개혁운동과 [琵琶記]토론>, <<동아문화>>
      18집(1981.8).
      * 릴리안 리 지음(김정숙, 유운석 옮김),  <<사랑이여 안녕. 패왕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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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楊富森, <중공에서의 경극개혁>, <<중국학보>> 제7집(1967.9)
      * 양회석 지음, <<중국희곡>>, 민음사, 1994.
      * 오창화, <매란방관>, <<중어중문학>> 제7집(1985).

      * 王政堯, <<<연행록>>과 청대 희극문화를 약론함>, <<중국사회
      과학원 연구생원학보>>, 1997년 제3기.
      * 장한기, <중국의 경극>, <<문학사상>> 제101호(1981.3).
      * 조재홍, 이남진 엮음, <<세계영화기행 2>>, 거름, 1996.
      * 許道經,(고승길역), <경극의 배우훈련과  극단생활>, <<한국연극
      >> 198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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